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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알토산마을 우리나라 최남단의 청정마을 알토산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토산당팟당장

    약 150년전 토산리 광산김씨에 당팟당장이라는 이가 있었다. 키가 후리후리한데 몸피는 보통 사람의 두배나 되었다. 탁배기(막걸리)는 한꺼번에 한 허벅을 먹어도 모자랐고 밥은 한 말어치를 한꺼번에 먹었다. 이런 체구였으니 힘이 장사일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당팟당장은 심술이 좀 고약스러운 데가 있었다. 그는 농사를 지으면서 목수일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해 부모가 년만해 가는 것을 보고 관을 미리 짜 놓았다. 그랬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손수 짠 이 관에 입관하여 장사를 지냈다.
    동네에서 담뱃대나 내두르는 어른들은 이것을 보고 야단을 했다. 제가 목수니까 공정을 서두르지 않으려고 제 애비의 관을 손수 짰으니 이런 고약한 놈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당시는 상사가 나면 관을 짜준 목수에겐 삼년상에 돼지 뒷다리 하나와 떡을 한 채롱 가져가게 되어 있었다. 이 음식물을 가져가는 것을 「공정 서른다」고 했다. 그러니 동네 어른들이 이놈이 구두쇠여서 인사 예법도 모르고 관을 제 손으로 짰으니 벌을 줘야 하겠다고 나온 것이다.
    벌은 당팟당장네 집에 대사가 났을 때 동네에서 일절 도와주지 않는 것으로 결정이 되었다. 그후 얼마 안 가 당팟당장은 집을 짓게 되었다. 당시는 집을 짓게 되면 동네에서 3일간 노력 협조를 해주엇다. 하루는 소를 몰고 나가 산의 나무를 날라다 주고 2일째는 흙일을 해주고 3일째는 울타리 담장을 쌓아주는 일이다.
    당팟당장은 한라산에 가서 나무를 베어 놓고 동네에 와서 소를 빌려 달라고 했다. 그러나 이미 벌칙이 내려진 대로 아무도 소를 빌려주지 않았다.
    당팟당장은 심술이 조금 생겼다. 홀로 산에 올라 가더니 삼간집 지을나무를 전부 한 짐에 지고 동네로 내려 왔다. 동네 길은 물론 좁았다. 긴 접재목을 진 당팟당장은 동네길을 내려오면서 이리저리 내저어 댔다. 동네의 밭담, 울타리 할 것 없이 모든 담장이 미끈하게 허물어져 갔다. 그래서 소를 아니 빌려준 집에 들어가 툇마루를 턱 밟고 올라섰다. 이 마루는 세치 두께는 될 가시나무의 마루인데 이 마루가 그만 우지끈 부러져 버렸다는 것이다. 이것을 본 동네 어른들이 「이놈 벌을 풀어줘 버려야지 안되겠다.」하여 다 소를 내놓아 나무를 실어다 주고 집을 지어 주었다 한다.
    당시는 산 다툼(묏자리 다툼)으로 싸움이 자주 벌어졌는데 이런 때 당팟당장은 단단히 한 몫을 했다 한다.
    어느 해 동네 사람의 상사가 나서 운구를 해 가고 광중을 파고 있었다. 마침 그 옆에는 다른 동네 사람의 묘가 있었는데 그 동네 사람들이 우루루 몰려와서 「우리 조상의 묘소 맥상에 장사할 수 없다」고 대들었다. 그래도 억지로 일을 진행해 가니 저쪽 사람은 파 놓은 광중에 드러누워 극력 저항하는 것이었다. 이젠 싸움이 날 판이다. 일이 난처해지자 상제가 당팟당장에게 "이거 영장호게 하여 줘사주 어떻홀꺼우까"하고 당부했다.
    당팟당장은 탁배기 한 허벅을 쓱 들이마시고는 나가더니 앞에서 대드는 제일 단단하게 보이는 놈을 하나 꽉 잡았다. 그래서 광중을 파던 곡괭이를 꺼내어 곡괭이 가운데에다 그 놈의 두 팔목을 놓고 쑤욱 구부려 마치 포승을 묶듯이 채워 버렸다. 그리고는 옆에 있는 터부룩한 나무를 뿌리째 홱 뽑아 내어 덤벼드는 놈을 그냥 후려 갈겨대니 상대방은 어디갔는지 순식간에 도망쳐 버렸다는 것이다.
    어느 해엔 나무 방아를 만들려고 한라산에 가 몇 아름되는 나무를 베어 방아를 파고 있었다. 이 때 뜻밖에 산감이 나타났다. 산감은 말할 것 없이 체포하겠다고 달려 들었다. 당팟당장은 가운데를 반쯤 파놓은 방아를 휙 쳐들어 머리에 툭 썼다. 마침 비가 부슬부슬 오고 있었다. 당팟당장은 그 무거운 방아를 쓴채 두어 발자국 앞으로 나서며 "비 맞지 말커든 이레오민 돼키어" 하니 그만 산감은 도망가 버렸다 한다.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 2리 김봉구(남. 82) 제보 >

    서산이왓

    지금으로부터 200여년 전이다. 당시 이 밭의 원소유주는 김종권의 부친이었다. 그 무렵 이 마을에는 성산, 구좌 근방에서 소금장수들이 많이 드나들었다.
    어느 날 심돌에서 온 소금장수가 자신이 이 밭 주인이노라고 나섰다. 주장하는 바 이유는 자신의 아버지 이름이 선산이라는 것이었다. 김종권네 집에서는 장난인 줄 알고 상대를 해 주지 않으니 그는 관에 호소했다. 관에서는 심돌 소금장수의 주장이 타당하다고 그에게 밭의 소유권을 인정해 줬다.
    원소유주는 너무 억울했다. 그러나 어찌 관을 상대로 싸울 수가 있단 말인가. 어찌 해 볼 도리가 없어 억울한 그대로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데, 열여섯 살 난 서당 학동 김경회가 자신이 관에 소지(訴紙)를 바쳐 김씨네 억울함을 하소연하겠노라고 나섰다. 한번 관에 잘못보였다가는 신세가 망하는 세상이니 제발 남의 일에 나서지 말 것을 동네 사람들은 말렸다. 그래도 그는 신념을 버리지 않고 소지를 써 원님에게 올렸다.
    「토산리에 있는 선산이왓이 저 먼 심돌 사람 선산이 소유라면 이웃 마을 가스름에 있는 전단이왓은 중국 제나라의 전단이라는 사람의 소유가 되어야 마땅하며 또 토산리 무당팟은 모든 무당들의 공소유가 되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썼던 것이다. 원님은 소장을 보고는 소지를 쓴 장본인을 불러들이라고 명했다. 사람들은 김경회가 관가에 불려가 경을 칠 줄만 알았다.
    그와는 정반대로 원님은 김경회의 논리정연한 소지의 내용에 감복하여 그를 보고자 했던 것이다. 선산이왓은 결국 김종권네 집안으로 소유권이 되돌려지고 김경회는 원님이 아껴 그의 임기가 끝나고 서울로 돌아갈 때 데려가니 그의 문필은 나날이 일취월장하여 승정원 사서직에까지 올라가는 벼슬을 살았는데 이 곳 출신으로서는 최고 관직을 보했던 터이다.
    이 후부터 사람들은 욕심을 부려 자기 것이라고 터무니없이 주장할 때, '선산이왓은 다 심돌 선산이꺼냐?'라고 나무란다고 한다.

    토산당지

    토산 2리 사무소 뒤쪽에 그 자취가 남아있는데, 그 유래는 임란때 왜선적수(倭船賊首) 3명이 식수를 얻기 위하여 이곳 사만구수(泗滿鳩水. 속칭 : 홀래물, 울리수, 토산 송천교 밑 샘물)에서 마을 처녀(3명)가 빨래하고 있는 것을 습격 겁탈한 끝에 처녀 3명은 그 자리에서 기절 사망하고 그 뒤 그들 영혼을 모신 것이 뱀으로 화하였다.
    제단은 없어져도 당토(堂土)만은 남아 있는데 당서쪽은 당머리동네, 당동쪽은 당골동네라고 부름.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 2리 김봉구(남. 82) 제보 >

    거슨새미와 녹슨새미

    토산리(兎山里) 웃마을과 아랫마을 사이에 [거슨샘이]라는 샘물과 [노단새미]라는 샘물이 흐르고 있다. 같은 구멍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생수인데, 한 줄기는 한라산 쪽으로 거슬러 흐르고, 한 줄기는 바다 쪽으로 흘러내린다. 그래서 전자를 '거슨새미', 후자를 '노단새미'라 부른다. '거슨새미'란 거슬러 흐르는 샘, '노단새미'란 우측, 곧 오른 방향으로 제대로 흐르는 샘물이라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이 두샘물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옛날 제주특별자치도에 날개 돋은 장수가 태어났다. 그 소식은 점점 퍼지기 시작하였다. 중국 황실에서는 제주도에서 장수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접하게되자, 두려운 마음에 호종단(胡宗旦)을 제주도에 급파시켜 산혈(山穴)과 물혈(水穴)을 모두 뜨고 오도록 지시하기에 이르렀다.
    구좌읍(舊左邑) 종달리(終達里)포구에 들어 온 호종단은 차츰차츰 명혈을 뜨기 시작하면서 거의 토산리에 이를 무렵이었다. '너븐밧(廣田)'에서 한 농부가 밭을 갈고 있었는데, 어떤 고운 처녀가 허겁지겁 밭 가는 농부에게로 달려오는 것이었다. 처녀는 매우 급하고 딱한 표정으로 하소연했다.
    "저기 물을 요 놋그릇(행기)에 떠다가 저 길마 밑에 잠시만 숨겨 주십시오."
    농부는 처녀의 말대로 거슨새미와 노단새미로 달려가서 놋그릇에 물을 떠다가 길마 밑에 놓아주었다. 처녀는 그 물속으로 뛰어 들더니, 곧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바로 그 처녀는 노단새미와 거슨새미의 수신(水神)인 것이다.
    농부는 심상치 않은 일이라고만 생각하며 밭갈이를 계속하고 있었는데, 호종단이가 왼손에 책 한권을 들고 농부에게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그 책은 중국황실에서 작성해준 제주도의 명혈(名穴)을 그린 산록(山錄)이었다.
    "여보, 말좀 물읍시다."
    "그러시오."
    "여기 '고부랑낭(고부라진 나무) 아래 행기물(놋그릇물)'이 어데에 있소?"
    "그런 물은 없는데요."
    "아, 들은 바도 없단 말이오?"
    "그렇소."
    '고부랑낭(고부라진 나무)아래 행기물'이란 '길마 밑에 있는 놋그릇물'이란 말로 산록에는 수신이 이미 거기와 숨을 것까지 알고 적어 놓은 것이다.
    호종단은 그것도 모르고 다시 한번더 갖고 온 산록을 살펴보더니, '여기가 틀림없는데, 여기가 틀림없는데...' 투덜대며 주위를 계속 샅샅이 찾아보기 시작했다. 찾다가 지친 그는 '쓸데없는 문서로고!'하며 산록을 태워버린 후, 서쪽으로 떠나 버렸다.
    그래서 종달리에서부터 토산리까지는 호종단이가 물혈을 모두 떠버렸기 때문에 생수가 솟는 곳이 없지만, 이 마을의 거슨새미와 노단새미만은 다행이 남아서 지금도 솟고 있다.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 1리, 김문옥(남) 제보 >